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표 도시 모스타르는 오랜 전쟁의 상처를 간직하면서도, 여전히 따뜻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재된 구시가지 중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리 모스트(모스타르 다리)’가 있다.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과거의 아픔을 연결하고 현재를 이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다리다. 이 글에서는 다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감성적인 여행 루트와 함께, 현지인들과의 만남, 그 따뜻한 시선과 이야기들을 깊이 있게 전하고자 한다.
다리 위에서 만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사람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이름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전쟁’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른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이 지역을 피와 눈물로 물들였고, 수많은 문화유산과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 폐허 속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고, 도시들은 천천히 회복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모스타르(Mostar)는 회복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 남부에 위치한 중소도시로, 이슬람과 크리스천 문화가 공존하며 발칸 특유의 다채로움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도시 중심에는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즉 ‘옛 다리’라는 이름의 석조 아치형 다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 다리는 오스만 제국 시절인 16세기에 건설되어 수백 년 동안 도시의 심장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1993년 전쟁 당시 파괴되었고, 이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2004년에 복원되었다. 이 다리는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연결하고 화해의 상징이 된 특별한 장소다. 하지만 모스타르는 단지 그 다리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이 도시에는 온기를 품은 사람들이 있고, 낡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뛰놀고, 시장에서는 따뜻한 빵 냄새가 피어오른다. 여행자들은 스타리 모스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구시가지 골목을 걷다가, 어느새 한 가게 주인의 따뜻한 미소에 발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연주자와 함께 박수를 치며 한참을 머물게 된다. 이 도시는 전쟁 이후 세월을 담담하게 견뎌낸 사람들의 힘으로 지금의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스타르에서의 여행은 관광지를 ‘본다’는 의미를 넘어, 사람들과 ‘마주친다’는 의미에 가깝다. 다리 위에서 만나는 청년, 카페에서 차를 나누는 노인,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까지, 그들의 눈빛에는 따뜻한 환대와 동시에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다. 이 글에서는 모스타르 다리 주변을 중심으로 하루 동안 걸으며 느낀 풍경과 만남을 통해, 이 도시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임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다리 위에서, 그리고 그 아래 흐르는 네레트바 강변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이라는 여행의 본질에 닿게 된다.
모스타르 다리 중심의 하루 도보 여행기
모스타르의 아침은 조용하다. 여행자의 하루는 구시가지 근처 게스트하우스에서 시작된다. 창문을 열면 붉은 지붕과 회색 석벽으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풍경이 펼쳐지고, 멀리서 들려오는 기도소리는 이곳이 단지 유럽의 한 도시가 아닌,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임을 느끼게 한다. 스타리 모스트는 다리를 직접 보기 전까지도 기대를 품게 한다. 좁고 구불구불한 자갈길을 따라 시장을 지나면, 어느 순간 눈앞에 우뚝 솟은 하얀 아치가 등장한다. 30m 높이에서 네레트바 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그 자체로 장엄하다. 다리 위에 서면 한쪽에는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이, 다른 한쪽에는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강물은 에메랄드 빛으로 흐르고, 가끔은 현지 청년들이 모금함을 설치한 뒤 다리 난간에서 과감하게 다이빙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 행위는 오랜 세월 모스타르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 용기와 유쾌함은 도시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다리 근처의 골목은 예술과 상인의 온기가 뒤섞인 곳이다. 은세공 장인들이 직접 만든 팔찌, 목걸이, 장식품들이 진열된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한국에서 왔어요?”라는 인사에 이은 “어서 오세요”라는 미소는 이방인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상처를 간직한 도시지만, 그만큼 따뜻하게 열려 있는 도시임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 언덕 방향으로 올라가면 ‘Koski Mehmed Pasha Mosque(코스키 메흐메드 파샤 모스크)’가 등장한다. 이슬람 사원인 이곳은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어 다리와 도시를 한눈에 담기에 최적의 장소다. 좁은 계단을 돌고 돌면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순간 모스타르 전경이 펼쳐지며 여행자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옆자리의 현지인 노부부가 “여긴 매년 와도 질리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는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리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보스니아 전통음식인 체바피(cevapi)를 빵과 함께 먹으며, 현지 와인이나 자두로 만든 라키야(Rakia)를 한 잔 곁들이면, 그야말로 완벽한 한 끼가 된다. 식당 주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음식에서 정성이 느껴진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맛은 이 도시의 깊은 문화와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오후에는 네레트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관광객의 소음에서 조금 벗어난 이 길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 강물에 발 담그고 쉬는 여행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가끔은 길가에서 현지 청년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하루의 마지막은 다리 아래서 맞이하는 석양이다. 햇빛이 점점 붉게 변하며 다리의 석조 표면에 드리워질 때, 도시 전체가 붉은빛으로 물든다. 그 시간, 이 다리는 더 이상 건축물이 아닌, 하나의 감정으로 다가온다. 전쟁으로 무너졌다 다시 세워진 이 다리처럼,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꿋꿋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스타르의 온기, 기억에 머무는 여행
모스타르를 여행한 이들은 다리를 보고, 풍경을 찍고,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지만, 결국 그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람’이다. 이 도시는 누군가의 고향이고, 누군가의 재건의 터전이며,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다시 걷기 시작한 공간이다. 여행자가 그저 스쳐 지나간 길이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자 희망의 장소였던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노상 상인의 눈빛, 낯선 이방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네던 어린아이의 용기, 식당에서 음식을 가져다주며 말은 없지만 눈빛으로 “맛있게 드세요”를 전하던 주인의 진심. 이 모든 장면은 여행의 풍경이자, 마음속 깊이 남는 기억으로 전해진다. 모스타르를 다녀온 이후, 우리는 여행이라는 것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시를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의 시간과 사람의 결을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스타르는 여행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도시이다. 다리 위에 선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자, 현재를 건너는 일이다. 스타리 모스트 위에서 강물 아래를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서 있는 이 다리처럼, 나 또한 과거의 어떤 상처를 딛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스타르는 오늘도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강인하게 흐른다. 강물처럼,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다리 위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이 도시는 언젠가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