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동시에, 18세기 영국 조지안 시대의 단정하고 우아한 건축미가 공존하는 도시 바스(Bath)는 그 자체로 시간의 켜를 간직한 공간입니다. 로마욕장에서 시작해 중세의 성당, 조지안 양식의 거리와 현대적인 온천 스파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는 수천 년의 역사와 다양한 문명적 미감을 겹겹이 쌓아온 특별한 장소입니다.
바스의 하루는 단순한 관광 코스를 넘어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감성이 교차하며 펼쳐지는 ‘시간 속의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시 곳곳을 걸으며 눈에 담기는 풍경 하나하나가 고요한 미학을 품고 있고, 그 속에서 느린 호흡과 깊은 감정의 회복이 가능해집니다. 로마 제국의 흔적을 따라 걷고, 조지안 거리의 고요함에 발걸음을 맞추며, 작은 찻집과 미술 공간에 머무는 하루는 바스가 가진 ‘느림의 가치’를 여행자에게 온전히 전달해 줍니다.
이 글에서는 바스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대표적인 공간들 — 로마욕장, 바스 대성당, 조지안 거리, 그리고 현대식 스파 시설까지 —를 통해, 단지 ‘보는 도시’가 아닌 ‘머무는 도시’로서의 바스를 깊이 있게 소개합니다.
로마욕장, 200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바스(Bath)는 이름부터가 '목욕'을 의미하듯, 이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상징은 단연 고대 로마욕장(Roman Baths)입니다. 바스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유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2000년 전 로마 제국의 기술력과 삶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 기원전 60년경 로마인들이 이 지역에 온천수가 솟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공공 욕장을 조성했으며, 이는 단순한 목욕시설을 넘어 종교, 사교, 건강 관리 등 일상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당시 로마욕장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의 교류와 의식, 휴식이 함께 이루어지던 복합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바스의 로마욕장은 이 전통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박물관과 체험 공간이 결합된 고급 관광지로 발전했습니다. 입장 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넓고 정갈하게 보존된 ‘그레이트 배신(Great Bath)’입니다. 따뜻한 온천수가 증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흐르고 있는 이 광경은,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줍니다. 고대 로마시대 사람들도 이곳에 앉아 피로를 풀었을 것을 상상해보면, 단순한 유적이 아닌 '시간을 마시는 공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석조 기둥들과 아치형 천장 구조가 등장합니다. 자연광이 스며드는 유리 지붕 아래로 비치는 따뜻한 물의 반사광은 공간 전체를 은은하게 감쌉니다. 유리 아래로는 원천수가 지금도 솟구치고 있으며, 당시 로마인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배수로, 물 공급 구조까지 세밀하게 남아 있어 로마의 토목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벽면에는 당시 방문객들이 남긴 기원문, 저주판(Curse Tablets), 신에게 바쳤던 청동 명패 등도 전시되어 있어 고대인의 정신세계와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 가득합니다.
관람 동선에는 현대적인 전시 방식이 접목되어 있어 몰입감을 더욱 높여줍니다. 3D 홀로그램, 인터랙티브 터치스크린, 사운드 장치 등을 통해 관람객은 실제 로마 시민이 된 것처럼 욕장의 공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구성된 어린이 오디오 가이드도 준비되어 있어 가족 단위 여행자에게도 훌륭한 교육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특히 인기 있는 구간은 신전 구역(Temple Courtyard)으로, 로마 시대에는 이곳에서 여신 술리스 민르바(Sulis Minerva)를 모시는 의식이 진행되었으며, 이 여신은 온천수와 치유의 상징으로 도시 전체의 수호신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바스 로마욕장이 주는 가장 특별한 순간은, 조용히 욕탕 앞에 서 있는 그 찰나의 시간입니다. 피어오르는 증기, 돌담에 맺힌 습기, 천천히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정말 이 자리에서 2000년 전 누군가도 나처럼 서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시간의 통로'가 됩니다. 바스 로마욕장은 단순히 유산을 구경하는 것이 아닌, 고대와 현재가 대화를 나누는 감각의 공간입니다.
이 도시가 단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라는 것을 가장 먼저 말해주는 곳이 바로 이 욕장입니다.
바스 대성당과 조지안 거리의 우아한 산책
로마욕장을 둘러본 후 바로 마주 보이는 곳, 바로 바스 대성당(Bath Abbey)은 바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공간입니다. 이 고딕 양식의 성당은 외관에서부터 방문객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습니다. 화려한 첨탑과 섬세한 부조, 종탑 아래로 펼쳐진 정연한 창문의 배열은 중세 건축의 정수 그 자체이며, 웅장함과 섬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절묘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천장을 따라 이어지는 리브 볼트 구조가 하늘을 향해 펼쳐진 듯한 개방감을 주며, 양옆 벽면에 장식된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살은 신성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완성합니다.
예배가 없는 시간대에는 일반 관광객도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으며, 조용히 내부를 둘러보며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고딕 예술의 세밀한 흔적들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타워 투어(Tower Tour)’는 바스를 높은 시점에서 조망하고 싶은 여행자에게 강력히 추천됩니다. 약 200개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좁은 통로를 오르면, 성당의 종탑과 첨탑 사이를 지나 바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감동적인 풍경이 펼쳐집니다. 황금빛 석재로 지어진 도시 전체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빛나며, 도시 설계의 질서와 조화를 실감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성당을 나서면, 본격적으로 바스의 조지안 거리들이 시작됩니다. 18세기 영국 상류층의 이상이 반영된 이 거리들은 당시 건축 철학과 도시 미학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어 마치 과거 속을 걷는 듯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더 서커스(The Circus)’와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입니다. 더 서커스는 원형의 거리 형태로 설계된 주택 단지로, 건축가 존 우드(John Wood)의 설계 철학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이 건물군은 외관이 원형을 이루며 하나의 조각 같은 통일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각 세부가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자아냅니다.
로열 크레센트는 말 그대로 ‘초승달(Crescent)’ 형태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주택들의 열을 말하며, 영국 조지안 시대 귀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고급 거주지였습니다. 그 외관은 지금까지도 개보수 없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박물관이나 호텔로 활용되고 있어 실내 공간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됩니다. 거리 전체가 하나의 건축 예술작품처럼 구성돼 있으며, 황금빛 석재와 간결한 기둥, 대칭적 창문 배열이 만들어내는 정갈함은 다른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산책 중 마주치는 작은 상점과 공간들도 바스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해줍니다. 전통 찻집에서는 클래식한 크림티 세트를 즐길 수 있고, 오래된 독립 서점이나 골동품 상점에서는 예상치 못한 보물 같은 물건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가로등이 은은히 켜진 해질 무렵, 거리를 걸으며 석조 건물 사이로 흐르는 시간의 결을 느끼다 보면, 이 도시가 왜 ‘가장 영국적인 도시’라 불리는지 자연스레 이해하게 됩니다. 바스는 단지 사진을 남기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걷는 역사책’이며 ‘거주하는 미술관’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도시입니다.
천천히 즐기는 바스의 하루, 여행자의 일상 만들기
바스는 단순히 관광 명소를 둘러보고 떠나는 도시가 아닙니다. 이곳은 머무를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곳, 천천히 걸으며 일상처럼 여행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관광의 속도에 익숙해진 여행자에게 바스는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건넵니다. 빠르게 사진만 찍고 떠나는 방식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이 도시만의 깊은 감정은, 곳곳에 숨어 있는 일상의 조각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스의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파머스 마켓이나 독립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작은 갤러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파머스 마켓에서는 수제 치즈, 로컬 허브, 소규모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채소, 직접 담근 잼과 피클 등을 만날 수 있으며, 바스 주민들의 느긋한 삶의 방식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마켓에서는 종종 작은 공연이나 거리 음악가들의 연주도 들을 수 있는데, 이런 사소한 순간이 오히려 여행의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습니다.
예술과 감성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바스 곳곳에 위치한 소형 갤러리와 공방도 빼놓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작가의 유화나 도자기, 직접 만든 인테리어 소품 등이 전시·판매되고 있으며, 작가와의 직접 대화도 가능한 곳이 많습니다. 단순한 소비를 넘어, 그 물건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제작자의 철학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관광지’가 아닌 ‘삶의 공간’을 경험하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이 도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단연 온천입니다. 바스는 영국 내에서도 드물게 자연 온천이 존재하는 도시로, 오래 전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온 온천 문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현대적 시설을 갖춘 대표적인 온천인 ‘서미 스파(Thermae Bath Spa)’는 전통과 현대의 감각이 공존하는 곳으로, 낮에는 햇살을 받으며, 저녁에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야외 온천을 즐길 수 있어 특히 인기입니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단순히 육체적 피로가 풀리는 것 이상으로, 마음의 속도까지 느긋하게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바스는 여행자의 감정까지 존중하는 도시입니다. 도시가 제공하는 감각은 매우 조용하고 섬세하며,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자연스럽게 허락합니다. 찻집 창가에 앉아 스콘과 잉글리시 티 한 잔을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간, 작은 서점에 들어가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앉아 읽는 한 시간, 그리고 아무 목적 없이 골목을 따라 걷다가 오래된 돌담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 이런 ‘소소한 무계획’이야말로 바스가 선사하는 가장 진정한 힐링입니다.
바스는 보여주는 도시가 아닌, 받아들이는 도시입니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걷고, 멈추고, 바라보며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 됩니다. 감정을 회복하고, 일상의 속도를 되돌아보며, 여행자가 스스로를 재정비할 수 있는 곳. 바스는 그러한 감성의 배경이 되어주는 조용한 치유의 도시입니다.
바스는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품은 채, 현대의 여행자에게 섬세한 감정의 여백을 제공합니다. 고대 로마의 욕장, 조지안 거리의 단정한 질서, 작은 찻집과 예술 공간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은 하루만의 여행으로는 부족할 만큼 풍부한 이야기와 감성을 담고 있습니다. 느리게 걷고, 깊이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이 스며드는 도시. 바스는 진정한 영국 여행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의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