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동쪽 끝,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놓인 섬나라 키프로스는 아름다운 해안선과 고대 유적이 조화를 이루는 여행지다. 잘 알려진 리조트 외에도, 키레니아, 파포스, 라르나카 인근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유적지와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해변이 숨어 있다. 이 글에서는 대중적인 관광 코스를 벗어나 키프로스의 정체성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진짜 여행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대 문명과 푸른 바다가 공존하는 섬, 키프로스를 걷다
키프로스는 유럽 대륙과 아시아, 중동의 경계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문명이 오가며 흔적을 남긴 섬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곳으로, 기원전 9천 년에 이르는 선사시대 정착지부터 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 십자군의 성채, 비잔틴 교회와 오스만 건축까지 다양한 문화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 여행자들에게 키프로스는 단순한 유럽 휴양지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해변 리조트, 칵테일, 요트 투어 등은 이 섬의 일부일 뿐, 진짜 키프로스를 마주하기 위해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골목과 해안선으로 향해야 한다. 지중해 특유의 햇살 아래 바다가 반짝이는 모습은 물론 아름답지만, 키프로스의 진짜 매력은 수천 년 전의 흔적이 그 자연과 조용히 어우러져 살아 숨 쉰다는 데 있다. 모래밭을 걷다 보면 고대의 신전 터를 지나고, 절벽 위의 요새 전망대에서는 오랜 전쟁과 무역의 흔적이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작은 마을에서는 아직도 손으로 빚은 도기와 전통 요리가 여행자에게 따뜻한 환대를 건넨다. 여행자 입장에서 키프로스는 ‘느림’을 통해 만나는 섬이다. 시간의 흐름보다 긴 흔적을 따라 걷는 여행. 관광객이 붐비는 유명 해변보다는, 자연과 사람의 결이 살아 있는 공간을 찾아 들어갈 때 비로소 진짜 키프로스가 다가온다. 이 글에서는 키프로스 남부와 북부, 두 문화가 나란히 공존하는 지역에서 만난 유적지와 숨은 해변들을 소개하며, 이 섬이 지닌 고요한 낭만을 전달하고자 한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시간의 결을 만나는 키프로스 여행지
여행은 대개 남부 도시 라르나카(Larnaca)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공항이 있어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해안가 산책로에선 전통과 현대가 동시에 살아 있다. 그러나 라르나카에서 차로 20분만 달리면, 곧 대중의 손길이 덜 닿은 장소들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코로시(Kourion)’다.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이 고대 도시 유적은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존재했던 로마 도시로, 반원형의 대형 야외극장과 모자이크 바닥을 간직한 고대 저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극장 뒤로 펼쳐지는 지중해의 수평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함을 선사한다. 다음으로 소개할 곳은 북키프로스의 ‘벨라파이스 수도원(Bellapais Abbey)’이다. 이곳은 13세기 프랑스 십자군 기사단이 세운 수도원으로, 고딕 양식의 폐허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키레니아(Kyrenia) 언덕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이 수도원은 무성한 올리브 나무와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명상과 사색의 공간이 된다. 특히 오후 늦게 방문하면 관광객이 거의 없고, 햇살이 석조 기둥을 부드럽게 감싸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포스(Paphos)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왕들의 무덤(Tombs of the Kings)’이 유명하다. 기원전 4세기부터 사용된 이 지하 무덤군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당시 귀족과 지배층의 장례문화와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암석을 직접 깎아 만든 거대한 기둥과 장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게감 있는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파포스에는 이 외에도 디오니소스의 집(House of Dionysos) 등 훌륭한 모자이크 유적들이 곳곳에 있어 역사 애호가들에게는 필수 코스다. 이제 해변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키프로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해변은 아야 나파(Ayia Napa)의 닉시안 해변(Nissi Beach)이지만, 우리가 주목할 곳은 ‘아프로디테 바위(Petra tou Romiou)’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곳이라 전해지는 이 바닷가에는 거대한 바위와 투명한 물이 어우러져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석양 무렵 붉게 물든 바위와 바다는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며, 바다 수면에 비친 빛의 결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북부 해안으로 가면 ‘골든 비치(Golden Beach)’라는 천연 해변이 있다. 터키계 키프로스 지역의 카르파시아 반도(Karpas Peninsula)에 위치한 이 해변은 5km 이상 펼쳐진 순백의 모래사장이 압도적이다. 주변엔 리조트도, 큰 마을도 없어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파도 소리만 들린다. 해변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수백 년 된 비잔틴 교회와 방치된 돌 무덤들이 무심히 놓여 있는데, 그 고요함은 오히려 여행자의 마음에 큰 감동을 남긴다. 여행 도중 만나는 작은 마을도 놓칠 수 없다. 레프카라(Lefkara)는 자수와 은세공으로 유명한 전통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여행자에게 레몬차를 권하며 집으로 초대하는 주민들도 종종 있다. 바닥은 자갈, 벽은 라임스톤, 천장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골목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이 작은 마을에서도 키프로스의 문화와 따뜻한 환대를 느낄 수 있다.
고요한 아름다움과 유산이 공존하는 섬에서
키프로스 여행을 마친 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화려한 리조트가 아니다. 오히려 바람이 지나가는 고대의 극장, 햇살이 내리쬐는 무너진 수도원 기둥, 그리고 발에 닿는 해변의 고운 모래와 조용한 마을 사람들의 미소다. 이 섬은 관광객을 향해 화려하게 다가서기보다, 묵묵히 자기의 시간을 살아가며 여행자를 초대한다. 유럽의 다른 휴양지와 달리, 키프로스는 소란스러움보다 깊은 호흡을 원한다. 단 하루만 머물러도, 우리는 이 섬의 시간에 물들게 된다. 고대의 무덤 앞에서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되고,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을 감게 된다. 이 섬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여행자를 감싼다. 특히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현실적인 경계는 오히려 여행의 깊이를 더해준다. 분단과 공존, 갈등과 문화가 동시에 흐르는 이 섬에서 우리는 여행이 단순히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곳은 과거의 상흔을 안고도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사람들의 땅이다. 키프로스는 오직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만 기억될 수 없다. 그것은 체험되어야 하고, 걸어야 하며, 사색해야 하는 대상이다. 관광지가 아닌 공간. 카메라보다 마음으로 담는 여행. 그것이 키프로스라는 섬이 진짜 여행자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섬에서의 여정은 마치 과거와 현재, 신화와 현실 사이를 걷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문명의 흔적과 인간의 온기를 동시에 느끼며 ‘여행’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